미스터트롯 김호중의 독보적인 스펙트럼, 그리고 그 극한의 짝사랑
스펙트럼은 빛을 파장에 따라 분해하여 배열한 것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스펙트럼은 그 파장이 가시광선 영역이다. 햇빛이나 백열전구의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가시광선 영역의 스펙트럼인 무지개 색깔이 나타난다. 이렇게 파장의 굴절률 차이를 이용하여 빛을 분해하는 것을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 영역의 햇빛은 보는 사람의 감각이나 기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단 하나의 색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햇빛을 보면 한 가지 색으로 보이지 두 가지 이상의 색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색과 무지개색으로 대표되는 일곱 가지 색은 규명 과정에서만 다양할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하나의 색 안에 일곱 가지, 아니 그 일곱 가지 색 안에서도 무한히 쪼개지는 미세한 스펙트럼의 나열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색들의 스펙트럼이 단 하나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색일 뿐이다.
스펙트럼의 존재와 상징을 편리하게 7이라고 규정할 때, 하나가 일곱으로 나타나고 일곱은 하나로 모여지는 현상은 그 하나라는 독특한 내적 본질이 어떠한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하나가 때로는 이런 색으로 때로는 저런 색으로 표현되고 기능하면서 그 하나의 다양성과 다변성을 증명하고 펼쳐낸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스펙트럼의 규명 과정에서 나나타는 것은 색이지만 그 스펙트럼을 드러내주는 1차 요인은 색이 아닌 빛이라는 사실이다. 즉 ‘색’을 분해해서 무지개색이라는 스펙트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빛’을 분해해서 무지개색이라는 스펙트럼을 얻는 것이다.
하나의 색에서 여러 색을 얻는 것은 같은 차원의 것이지만, 하나의 빛에서 많은 색을 얻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색의 스펙트럼이 아닌 빛의 스펙트럼이라는 차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빛과 색은 그 본질과 기능 자체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빛은 능동적이고 동적인 속성을 지녔지만 색은 피동적이고 정적인 속성을 지녔다. 빛은 상층적이지만 색은 하층적이고, 빛은 통치성을 가졌지만 색은 피통치성을 가졌다. 빛은 생명성을 가지고 나아가지만 색은 물성을 가지고 머물기만 할 뿐이다.
스펙트럼과 그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김호중 이야기를 해보자. 김호중을 스펙트럼에 비춰본 것은 김호중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호중은 당연히 한 사람이면서 하나의 사람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아주 다양하다. 물론 이때의 다양성은 같은 계열에서 비슷한 것을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거나 같은 계열에서 그 위치가 멀리 벌어져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색이 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빛이 색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호중이 미스터트롯에서 지금까지 부른 노래를 보면 김호중은 레파토리를 보여주지 않고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각각의 노래들은 같은 영역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각기 다른 영역, 각기 다른 차원의 노래들이 김호중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 색의 스펙트럼으로 나타난 것처럼 김호중은 미스터트롯이란 방송을 통해 다양한 색채와 빛깔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스펙트럼을 운동성으로 정의할 때 스펙트럼은 직진성보다는 수평으로 펼쳐지는 평형성이라고 해야 한다. 동시에, 그 평형성이 가진 끊임없는 내적 운동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완성된 형질을 남기고, 그러면서 또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서 또 그렇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을 김호중은 주현미의 짝사랑으로 드러냈다. 만일 김호중이 짝사랑을 부르지 않았다면, 불렀어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기존의 발성과 창법으로 불렀다면 김호중은 이런 극적인 스펙트럼을 증명할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 설령 추후에 불렀다고 해도 그것은 스펙트럼의 존재를 증명할 무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할 공산이 크다.
얼마 안 되는 기회의 무대에서 김호중은 자신이 가진 스펙트럼의 존재와 그 스펙트럼의 색채를 소중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증명해냈다. 그 스펙트럼에서 제일 끝쪽에 있을 법한 짝사랑을 부름으로써, 그 스펙트럼을 유발하는 원인자로서의 김호중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 극단의 스펙트럼에 따른 위치 설정으로로 인해 김호중에게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호중이 주현미의 짝사랑을 선곡한 것은 동물적인 본능, 아니 빛이라는 스펙트럼에서 나타나는 광물적인 본능에 따른 것일지도 모른다. 빛은 색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여러 색으로 나타나기에, 김호중의 음악적 성향도 각각의 노래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면서 여러 영역에 속한 각각의 노래가 유기적인 노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햇빛을 볼 때 햇빛 그 안에 있는 스펙트럼의 빨간색이나 초록색이나 보라색을 떠올리는 것은 햋빛만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생명력이다. 마찬가지로 김호중을 떠올릴 때 ‘태클을 걸지 마’와 ‘무정 부르스’에 이어 ‘희망가’, 그리고 ‘천상재회’를 넘어 ‘짝사랑’을 불렀다는 것은, 그것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창법으로 불렀다는 것은, 아니 성악가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그 정 반대쪽에 있는 스타일의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했다는 것은, 김호중이 그 어떤 노래와 그 어느 영역을 탐색할지라도 김호중의 스펙트럼이 가진 극단의 색채와 빛깔을 떠올리게 해주는 후광 효과로 작용할 것이다.
스펙트럼을 음악으로 말한다면 마치 배음 같다고 할까. 김호중이 어떤 노래를 부르는 순간에도 청중은 김호중에게서 짝사랑이라는 배음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의 존재를 이번 기회에 장치하지 않았더라면 대중은 김호중의 스펙트럼과 배음을 전혀 몰랐을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진정 안타까운 일일 터, 생사가 달린 절호의 기회에서 선보인 극한의 색깔을 이렇게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